광화문역 4번 출구에서 출발
첫번째 탐방은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로 1902년 세운 기념비로 사적 171호로 지정되어 있다. 기념비전 사방 모서리에는 12지신 동물과 해태,용모양의 석상이 있다.
중량천 | 6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종로 육의전의 뒷골목 피맛골 : 조선시대 서민들이 종로를 지나는 고관들의 말을 피해 애용하던 뒷골목인데, 당시에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말을 탄 고관대작을 만나면 행차가 끝날 때까지 엎드려 있어야 했다. 때문에 갈길 급한 서민들이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이용했는데 피마(避馬)에서 유래해 이름이 붙었다. 2003년 이 일대의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나 반대의견이 많아 보전하기로 한 곳이다. |
수송공원의 이종일 선생 동상 : 민족 교육을 위해 흥화학교을 설립하고 1905년 보성학교 교장에 취임, 또한 30세 전후의 청년들을 모아 애국단을 조직, 인재양성과 신문사업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1898년에는 순 한글의 [뎨국신문]을 창간해, 일반대중은 물론 여성들까지 포용할 수 있는 애국계몽지를 간행하였다. 1919년 독립선언서를 보성사에서 인쇄, 배포한 독립운동가이다.
도심 속의 작은 공원에는 대한매일신보 창간 사옥터와 그 자리에 세운 중동학교터, 숙명여학교 옛터, 묵은 이색 영당이 있다.
수송공원 바로 옆의 조계사는 대한불교 직할교구 본사로서 조계종 총무원, 중앙종회 등이 자리하고 있는 한국 불교의 중심 사찰이다.
조계사의 전신은 현 수송공원(전 중동고등학교 위치)에 일제치하인 1910년 한용운, 이희광스님 등에 의해 창건된 각황사이다. 그 뒤 태고사로 개칭되어 1936년 한국 불교의 최고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다가 1954년 일제의 잔재를 몰아내려는 불교정화운동이 일어난 후 지금의 조계사로 바뀌었다. 조계사 법당은 불교행사의 중심 장소로서 거의 일년 내내 법문이나 염불, 강좌, 또는 제사라든가 그 밖의 의식들이 거행되고 있다.
조계사 법당 뒤에 자리한 건물은 조계종 총무원으로서, 조계종단 전체를 관할하는 행정기관인 만큼 다양한 행사와 활동으로 분주하다.
법당 앞에는 1930년에 조성된 7층석탑이 있다. 석탑 안에는 부처님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는데, 이 사리는 스리랑카의 달마바라 스님이 1914년 한국에 모셔온 것이다.
이 석탑 양편에는 석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법당을 바라보면서 왼편으로 종각이 있다.
조계사 마당에는 천연기념물 제9호인 오백 여년이 된 백송(흰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원산지는 중국으로 높이 12m, 둘레 1.67m로서 일반 소나무는 잎이 두 개인데 백송은 세개이다.
또한 법당 정면에는 사백년된 24m 높이의 회화나무가 있어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데, 원래는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고 독립운동가인 경주 김씨 김교헌 집안에 있던 나무이다.
조계사를 나오면, 바로 앞에 우정총국이 있다.
전의감 건물로 사용되다가 1884년 4월 22일 왕명으로 우정총국(초대 총판 홍영식)이 개설되고, 그해 11월 18일부터 5문과 10문 2종의 우표를 발행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우정업무가 시작되었다.1906년에는 중동학교가 설립되면서 1915년까지 교사로 사용되었다. 현재 사적 2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의 왕실 그림을 그리던 화원들의 일터인 도화서터 표지석. 도화서는 숙종 때에 중구 수하동 옛 청계국민학교 자리로 옮겨갔고, 20세기에 들어 폐지되었다. |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문화거리인 인사동,조선 시대부터 문인과 예술인들이 교류하던 곳이다. | 일제 강점기때 골동품 상점이 들어서기 시작하였고, 해방 후 1970년대 들어 화방 등 미술 관련 상점,화랑이 집중되면서 문화거리가 되었다. 1988년 전통문화거리로 지정, 2002년에는 문화지구가 되었다. |
사적 제354호. 탑공원·탑동공원이라고도 하며 서울 최초의 근대 공원으로 면적은 1만 5,720㎡이다. 이전에는 파고다공원이라 했으나, 1992년부터 옛 지명을 따 탑골공원이라 개칭했다. 고려 때는 흥복사가 있었으며, 1464년에 원각사라 개칭하여 도성 안 제일의 사원으로 중건했다. 조선시대 억불정책이 강화됨에 따라 중종 때 원각사 건물이 모두 헐리고 빈 터만 남았다. | 원각사지10층석탑(圓覺寺址十層石塔:국보 제2호) : 높이 12m. 전체를 대리석으로 건조했으며 4면두출성형(또는 亞자형)의 평면으로 된 3층의 기단, 목조건축물의 형태를 모방한 10층의 탑신, 탑 표면의 장엄한 조각장식 등이 그 유례가 드문 특수한 탑이다.1348년 개성근교에 건립된 경천사10층석탑을 본떠 1465년(세조 11) 원각사 창건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후 및 추존된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으로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종묘는 태조 3년 (1394) 10월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그해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1395) 9월에 완공 하였으며, 곧이어 개성으로부터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셨다.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주가 모셔져 있고, 정전 뜰앞에 있는 공신당에는 정전에 계신 왕들의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1995년 '서울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의거하여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길건너의 세운전자상가는 1968년 세계의 기운이 모이다 라는 뜻을 가진 국내 최초의 종합전자상가이자 40년 전통의 전자상가이다. 1945년 무렵 종로-을지로 일대는 일본에 의해 소개공지로 지정되었다. 당시 일본은 미국 등 연합군의 폭격에 대비해 아무런 건물도 짓지 않는 공터인 소개공지 조성 사업을 벌이고 있었는데 세운상가 일대가 그 중 하나로 한국전쟁 이후 집을 잃은 이재민들이 대규모 판자집을 살기 시작했으나 1966년 대한민국 최초의 도심재개발사업으로 계획되어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하고 2년만인 1968년국내 최초의 주상복합단지인 세운상가가 탄생하였다.
종로 귀금속 상가는 국내 최대 규 모의 귀금속 전문상가로 상가수가 700-1,000여개에 달한다. 사실 이곳은 고객의 90% 이상이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귀금속점주와 중간상인들로 도매가 대부분이다.
종로는 조선시대부터 서울 제1의 상권이었다. 금은방이나 전당포가 많았던 것도 유동 인구가 많고 상권이 발달한 까닭이다. 지금 같은 귀금속 거리를 이룬 것은 1960년대부터다. 예지동을 중심으로 그 범위가 확장되면서 종로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종로가 학원가와 유흥가 중심으로 변모를 거듭했어도 귀금속 상가만은 변함없이 활발하다. 지금도 전국 주얼리 물동량의 70%를 차지한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종로3~4가의 대로변에 있는 도소매 상점이다. 종로 귀금속 상가의 신상권에 해당한다.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으며 혼수품을 구매하는 예비 부부의 발걸음도 잦다. 시중가보다 약 20~40% 저렴한 가격으로 귀금속을 구매할 수 있어 실속파에게 인기다. 대부분의 귀금속 상가들이 가공 공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가격을 낮출 수 있는 까닭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예지동 일대에는 3.3제곱미터 남짓한 금은 세공 업소가 즐비하다. 정부는 향후 3년간 55억원을 투입해 종로귀금속거리를 보석가공ㆍ수출의 메카로 육성하려고 한다.